121. 오전 10시에 수영하는 남자 (4.느낌 | 1-4)
[백수의 첫 책 쓰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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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지글) 4. 느낌|① 나도 수영할 수 있다 -4
(전개 c)
오전 10시에 수영하는 남자는 존재감이 뚜렷하다
"준우 씨. 잠깐 이쪽으로 오세요."
그는 나를 물 위에 띄운다. 그리고 내 팔을 꼭두각시 인형 다루듯이 움직이면서 사람들에게 수영하는 자세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수영 설명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다. 하지만 여전히 부끄럽다. 강사가 수영 자세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를 부를 때면 얼굴부터 달아오른다.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는 수영장에서 사각팬티 같은 수영복 하나 입고 물 위에 떠 있는 건 아무래도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 싫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34살에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수영 기초반에 들어갔을 때, 젊은 친구들이 가득했다. 중급반이 될 때까지 그랬다. 그들은 30대인 나보다 훨씬 더 체력이 좋았다. 그런 이유로 수영을 배울 때, 내가 가장 앞자리에 서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수영은 실력이 좋은 사람이 앞쪽 편에 선다. 정해진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하지만 상급반(평형과 접영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함께 배우던 20대 남성과 여성 회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수영반의 단계가 오르면 오를수록 젊은 사람 대부분이 떠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는 30대 후반에서 그 이상의 나이대의 여성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남자가 한 두 명만 남게 되었다. 남자들이 다 사라지자, 나는 강제로 가장 앞자리인 1번 자리에 서게 되었다. 분명히 나보다 수영을 잘하는 중년 여성분들이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남자라는 이유로 맨 앞자리까지 떠밀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살짝 뒤편에 서 있으면 언제나 색출되어 앞으로 보내졌다.
1번 자리에 서면 운동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물길이 생성되지 않은 고여 있는 물을 처음으로 뚫고 나가야 하고, 뒤로는 끊임없이 추격해 오는 사람들을 따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2번인 사람이 실수로 내 발을 터치하기라도 할 때면 부담감이 200배로 커진다.
내가 2번에게 말한다.
"먼저 가시겠어요?"
그러면 2번이 대답한다.
"아니요.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은데?? 이런 제길?' 나는 속으로 절망한다. 2번에게 따라 잡히지 않기 위해 손발을 바삐 움직이는 방법 밖에 없다. 결국에는 페이스를 잃고 자세도 흐트러진다. 맨 앞에서 수영하는 사람은 뒤따라오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실제로 더 힘들기도 하고, 쫓기고 있다는 압박 때문에 에너지 소비가 더 크다. 그런 이유로 1번 자리에서 수영을 하게 되면 그 운동 효과가 1.5배는 되는 듯하다. 가끔씩 나보다 실력이 좋은 남성 회원이 들어올 때면 1번 자리를 양보(?)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랫동안 꾸준히 수영에 참여하는 남성은 지금까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1번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맨 앞에 서는 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렸다. 나도 뒤에 서고 싶다. 그래서 요즘은 맨 뒤편에 있는 사람을 가끔씩 따라잡곤 한다. 그러면 또 잔소리를 듣겠지.. 허허 이것 참.
1번은 참 힘들고 부담스러운 자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도 있다. 일단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있다. 운동 효과는 확실히 보장된다. 그리고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나름의 장점이다. 모두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다. 같은 반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킬 수도 있다. 1번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타이틀. 혹은 수영 설명 도구 인간이라는 타이틀. 그래서 웬만해서는 미움받지도 않는다.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같은 반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다. 그렇다 보니 본의 아니게 낯가림이 저절로 사라지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효과를 볼 수 있게 된다.
남성들과 다르게 여성은 타인에게 관심이 많은 듯하다. 칭찬에 인색하지도 않다. 나의 경우, 누군가가 잘하는 모습을 본다고 해도 딱히 칭찬하거나 관심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들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특별하지 않은 액션을 보여도 엄지를 척 세워 올리곤 했다. 멋지다거나 잘한다는 표현을 전혀 아끼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게 되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자존감 또한 저절로 높아졌다. 자존감을 키우는 데 이보다 좋은 환경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나로서는 감사한 일이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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